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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지도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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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NMSNUH 작성일2017-04-17 조회2,35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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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지도학생



금년도 새 학기가 시작됐습니다. 이 글이 의과대학 교수님과 학생에게 조그마한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는 사람과 교류할 때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다. 인간 관계의 폭이 넓지는 못해 새로운 친분을 많이 만드는 편은 아니나, 한번 맺으면 오래 지속되고 깊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오늘은 내가 의과대학교 학생 시절 지도교수님과 인연, 또 후에 내가 교수가 되어 맡은 지도학생과의 인연을 소개하겠다.

의과대학은 타 대학보다 학생 수에 비교해 교수가 많다. 병원에서 일하는 여러 분야의 임상교수 때문이다. 내 학창 시절 학년당 학생 정원은 160명에 교수 수는 250분 정도이었다. 학생지도를 원하면 교수 한 분에 3-5명 가량 학생이 배정되었다. 또, 의대에서는 전체 강좌가 필수과목이기에 학생들은 거의 모든 교수에게 강의를 들어 낫 설은 선생님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우수한 인적자원이 의과대학에 들어 온다. 이 때문에 교수와 학생 모두 서로를 특별하고 소중한 인연으로 여긴다. 교수는 나라와 인류의 영재를 가르친다는 자부심으로 학생은 훌륭한 스승과 가깝게 지낸다는 광명심을 가지고 만난다. 또, 도제식 교육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의대에서는 선생님의 행동 하나 하나가 role model로 작용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 학생 때 세 분을 지도교수로 모셨다. 의예과 시절에는 내과 김정룡 교수님, 의대 본과 1-3학년에는 생리학 김기환 교수님, 4학년 때는 미생물학의 차창룡 교수님이었다. 우연하게 모든 분에게 우리가 첫 지도학생이어서 관심 있게 대해 주었다. 

미국에서 간염 바이러스를 연구하고 갓 귀국한 김정룡 교수님은 탄탄한 학문적 배경과 카리스마로 지도학생을 대하였다. 1971년 4월에 명동 한일관에서 우리 학생과 첫 회식을 가진 후 선생님이 너무 바빠서 더 이상 모임은 없었지만, 장학금 추천서 때문에 몇 번 연구실에 찾아갔다. 권위 있는 딱딱한 인상과는 달리 부드럽게 조언과 격려를 해 주어 어린 마음에도 좋았었다.

의예과를 마치고 본과에 올라와 힘겨운 의학공부를 시작할 때 김기환 교수님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집안에 의료인이 없는 나에게 학업뿐 아니라 전반적 생활을 지도 해 주었다. 일요일에는 서울 근교에서 등산을 하고 사모님이 마련해준 고기를 돌판 위에 구어 먹곤 하였다. 장래의 전공으로 기초의학과 임상의학 사이를 방황하는 나에게 기초학문에 대한 사명감이 없으면 임상의사가 되라고 적절한 충고도 해 주었다. 또 선생님은 손수 행동으로 꾸준히 공부하고 연구하는 교수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내가 3학년을 마칠 때, 선생님은 독일 푸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장기연수를 떠났다.

본과 4학년이 되자 군복무를 마치고 갓 부임한 차창룡 선생님이 지도교수가 되었다. 이전 선생님 보다는 나이 차이가 적어, 스승과 제자 보다는 믿고 따르는 숙질叔姪 같이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특히 우리 교실 시니어 선생님들과 가깝고 공동 연구도 많이 해서, 내가 모교에 교수가 되면서는 정말 일가처럼 지냈다. 선배 교수의 입장으로 학교생활과 일상에서 충고와 격려도 많이 하고 지금도 자주 만나 도움을 받고 있다. 이 자리를 빌려 깊이 감사 드린다.

나는 1985년 가을 서울의대에 전임강사로 임용되고 그 다음 학기에 본과 신입생인 남녀 각각 3 명을 지도학생으로 배정 받았다. 그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고교생 과외공부를 금지하고 졸업정원제로 대학교 입학생을 늘리자, 집안에 경제적 여유는 없지만 똑똑한 학생들이 많이 의대에 입학하였다. 지방 학생이 반수를 넘었다. 내 지도학생들도 대부분 풍족하지 않았다. 어떤 학생은 고등학교 선생님이 자청하여 방과 후에 남아 따로 가르쳤단다. 나는 김기환 선생님을 흉내 내어 우리 집에서 불고기로 이들 배를 불리곤 하였다. 

이 들이 1학년 첫 기말고사를 무사히 치르고 내 방에 찾아왔다. 의과대학생이 이 시험을 통과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지난 한 학기 6 개월 동안 방대한 양의 영어 원서와 씨름해 이기고, 해부실습 같은 난관을 극복해, 이제는 의학공부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나는 약간 무리이지만 진심으로 축하해 주려고 명동 나이트클럽에 함께 가서 밤 늦게까지 즐겼다. 나중에 내 차를 취중 운전하여 여학생을 집에 데려다 준 아찔한 기억이 남아 있다. 음주운전이 위험하고 불법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1988년 초 나는 미국 NIH(National Institutes of Health)로 장기연수를 떠났다. 지도학생을 다른 교수에게 인계하고. 그 후 30 년이 흘렀다. 마침 이중 한 명이 나와 같은 핵의학을 전공해 소식은 간간히 듣고 있었다. 재작년 미국핵의학회가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렸다. 이곳에 이민 온 지도여학생을 우연히 만났고 옛 인연에 의해 내 수필집을 남편 출판사에서 발행하였다.

금년 초에 첫 지도학생들과 연락이 되어 가까운 고기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재회를 가졌다. 캐나다에 사는 여학생을 빼고는 다 모였다. 세 명이 유수한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남학생 한 명은 울산에서 개업을 하고, 여학생 한 명은 제약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내 짐작보다 나이가 많아 어느덧 50대 초반으로 모두 자기 분야에서 중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내가 교수로 만났을 때의 나이가 서른세 살이었다는 사실에 서로 놀랐고, 겨우 2년 동안만 지도했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더 오랜 기간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기억을 모으고 합쳐, 30년 전 일을 이야기로 엮어 가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배고픈 하숙생 시절, 내가 사주던 ‘버드나무 집’ 고기 맛을 못 잊어 울산에서 올라 왔다고 했다. 내 강의, 나이트 클럽, 음주 운전 이야기도 나왔다. “아들이 선생님 수필집을 읽고 의과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막상 교수가 되어보니 선생님처럼 학생에게 신경쓰기가 어렵더라.” “선생님을 의사 생활의 모델로 삼고 있다.” 등 나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였다. 식사 후 우리 집에 와서 아내를 만나고 나서야 헤어졌다. 내가 쓴 네 권의 수필집을 선물로 주었다. 그 동안 지내 온 내 삶과 생각을 알려주고 싶어서 였다.

이번 만남을 즐기면서 끝 없이 이어지는 인간사에 내 자신도 놀랐다. 어떤 연유로 나를 지도했던 세 분 교수님의 생각과 태도가 나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를 흉내 낸 나의 행동이 지도학생에게 작용하였고, 또 이것이 다음 세대에게 새로운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해보니 인연의 힘과 소중함이 두렵고 새삼스러웠다. 물론 밑바닥에는 의과대학 교수와 학생 사이에 있는 남다른 가치 인식과 상호 존중이 자리 잡고 있다.

 

 

- 2017.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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