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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순 선생님을 회상하며 - 정준기 교수(서울대병원 의학역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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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NMSNUH 작성일2012-08-22 조회8,66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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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순 선생님 회상

2012년 8월 6일 아침에 안타깝게도 고창순 교수님이 타계하셨다. 서울의대에서 평생을 보낸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의학자이면서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핵의학과 갑상선학을 전공하신 교수님은 의학 지식 뿐 만 아니라 인성적인 면에서도 우수한 제자를 키우려고 노력하신 진정한 선생님이셨다. 나는 35년간 가까이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지내는 행운을 입었다. 이 분복을 나누는 입장에서 생각나고 느낀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적어 본다.

우선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좋아하셨다. 흔히 사용하는 교수, 과장이나 부원장이라는 말은 직함을 나타내기 때문이었다. 박사라는 호칭을 피하는 것은 의료계에서 의학박사는 너무나 많고, 또 선생님이 박사를 손수 만들어 주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보다 인생을 먼저 살고 있어 가르쳐 준다는 의미의 선생先生님이 가장 적절한 호칭이라는 생각이셨다.


어려서부터 선생님은 천성이 낙관적이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162 cm 의 단신이 되었지만, 중학생 시절 까지는 작지 않고 탄탄한 체구에 영리한 소년이었다. 평생을 고향에서 외과의로 일생을 보낸 아버지와 해방 후 정치에 참여한 여장부인 어머니 아래  7남매의 막내로 경기중학, 경기여중을 다니는 형과 누나가 있었다. 생각해 보시라, 그 당시 경남 의령 시골에서 우리나라 최고인 경기중학과 경기여중에 연달아 합격을 했으니. 이러한 자랑스러운 가풍에 체력과 지능이 남보다 뛰어났던 소년은 어릴 적부터 거칠 것이 없었고 골목대장을 도맡아 하였단다.


선생님의 경남중학교 동기생인 용인송담대학교의 최영철 이사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선생님은 항상 학교 담벼락 위를 걸어 다녔다고 한다. 학교 훈육주임이 보이면 교내로 들어오고, 안 보이면 밖으로 뛰어내려 극장이나 광복동 시장으로 놀러 다녔다고. 그러나 밤늦께 돌아 와서도 잠자기 전에 반드시 1-2 시간씩 공부를 해, 전교 수석을 한 적도 있단다. 우수한 체력에 운동감각도 있어 축구부에서 활동하고 태권도를 즐겨해 이런 학창 시절의 인연으로 김영삼 대통령과 부산 출신 정치인들과 연결이 된다.  


부모님은 좌충우돌하는 막내가 걱정이 되어 다소 엄하게 키우셨다. 올바른 정신을 가르친 영향으로, 초등학교 시절 반장으로 급우를 챙겨 주고 일본인 교사에 대항하여 스트라이크를 주도하기도 했다. 평생을 시계처럼 성실하게 살아 온 아버님과 남의 일에 발 벗고 다니는 어머님의 생활 자체가 고 선생님의 성격과 의지 성장에 무엇보다도 큰 역할을 했으리라. 


서울의대 부속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방사선의학연구소에서 5년을 근무한 후, 1969년에 서울의대 교수로 복귀하셨다. 연구소에서 고위직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깊이 있는 연구 뿐 아니라 공직사회의 정서와 질서를 익히고 넓은 인맥을 쌓았다. 나중에 선생님이 의학계의 리더로 활약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중년과 장년 한창의 나이에 서울의대에서 교육, 진료, 연구와 봉사를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하셨다. 어려서부터 다져 온 몸과 마음에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나는 선생님 책상위에 “태양처럼 뜨겁게 살리라”라는 시구를 본 적이 있다. 이 모토에 걸맞게 일과 후에도 누구 못지않게 토론, 회식과 음주를 즐겼고, 사회 교제에 열중하셨다.


이런 생활은 사모님이 뒤에서 든든하게 지켜주어서 가능했다.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부자 집의 무남독녀인 사모님은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 선생님과 결혼하셨다. 일본에서 교육 받고 자라서 남편에 순종파인 사모님은 막내며느리지만 홀로되신 시아버지를 모셨다. 고 선생님은 이런 배경을 믿고 전문의가 된 후에도 10년 동안 월급을 집에 가져오지 않고 선후배와 교제하며 사회 생활하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이렇게 꽉 찬 내실과는 달리 밖으로 선생님은 겸손하셨다. 자서전에서 선생님은 젊어서부터 생긴 암 덕분이라고 하셨다. 인턴이던 24세에 대장암, 부원장이던 50세에 십이지장암, 정년을 맞은 65세에 간암이 생겨 평생을 죽음과 마주하며 보내 남들과 다른 생활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재물이나 명예 등 부질없는 세상의 유혹을 떨치고 참 가치가 무엇인가를 항상 생각하고 게셨다. 

아마도 내리신 결론이 남을 도와주고 타인과 함께 성장하는 win-win 전략인 것으로 짐작한다. 자서전 제목이 “도전과 화합으로 걸어 온 삶”인 것이 그 증거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도 타인과 다른 조직 간의 화합과 통합을 추구하셨다. 일찍이 1980년도 초에 갑상선학회와 내분비학회를 통합하고, 또 노인병 관련 3학회를 통합하였다. 선생님은 항상 이렇게 서로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단합해 목표와 비전을 성취하는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셨다.

선생님은 넓은 시야와 사물의 핵심을 찾는 안목을 가지고 계셨다. 이러한 능력으로 우리나라에서 의료의 새 장을 열 때 마다 선생님이 주도하시곤 했다. 1977년 처음 뵙고 식사하는 나에게 말씀했다. “나는 밥 잘 먹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잘 먹는 사람은 자연히 건강해져 일과 공부를 잘 하게 되므로 좋아 한다는 해석이었다. 또, 선생님이 주관하신 장학회에서는 성적이 나쁜 의대생에게 우선적으로 장학금을 주었다. 좋은 지능에 성적이 나쁜 것은 경제란 등 공부를 할 수 없는 환경 때문이니까, 우선적으로 지원해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였다. 이렇게 관습적 생각에서 벗어나 핵심을 꿰뚫는 지혜와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님은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진심으로 대해, 의료계 안팎에 넓은 인맥을 가지고 계셨다. 한번 만나면 소탈하고 거짓 없는 태도에 오랫동안 친교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교적인 성격으로 1978년 법인체로 출발한 서울대학교병원의 제1, 2부원장을 맡으면서 이 거대한 조직이 안정화 되는데 크게 기여하셨다. 후에 문민정부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주치의를 맡으셨고, 정부에서 의과학 연구를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게 하였다.

1916년 경성의전을 졸업해 우리나라 초창기 양의사이신 아버님을 따라 의학에 입문한 선생님은 천성적인 의사였다. 조금이라도 연줄이 있는 환자는 가족처럼 돌봐주셨다. 남을 도와주기를 즐겨해 선생님 방 앞에는 항상 다급한 사람들이 줄서있었다. 선생님의 생활신조가 ‘하루에 한사람 돕기’라고 기억한다.

무엇보다도 선생님은 물심양면 전 방위적으로 정성을 들여 제자를 키우셨다. 많은 제자들이 감화를 받아 선생님을 ‘학문적 아버지’로 여기면서 생활하고 있다. 12월 31일 마지막 날, 제자들과 함께 그 해를 깨끗이 보내는 의미로 같이 목욕을 하곤 했다. 새해에는 모두들 선생님 댁으로 세배를 갔다. 당시의 관습으로 모든 내과 전공의가 다 모여 들었다. 100여 명이 넘는 제자들의 식사를 챙기느라고 사모님께서 특히 고생하셨다.

무엇보다도 선생님은 따뜻하셨다. 항상 우리들을 격려하셨고, 제자를 위해서 당신이 희생하는 일을 밥 먹듯이 하셨다. 부원장으로 바쁘신 가운데에도 제자들이 소원해지면 섭섭해 하셨고, 즐겨 진료와 연구에서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시려고 노력하셨다. 지도학생인 일개 의대생의 고민을 밤새고 들어 주시고 의논해 준적도 있다. 제자들의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 선생님은 용의주도한 계획 하에 필요하면 온 몸으로 부딪치고 뼈를 깎는 노력을 하셨다. 그리고는 이루어 내셨다. 립서비스 만하는 여느 스승하고는 달랐다.

그러나 제자 교육에는 철저하셨다. 내가 인턴 때에도 핵의학 책을 주고 공부시키고, 전공의 2년 차에 핵의학과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가동될 때, 심장핵의학, 동적 영상 분석 등에 사용하는 전산 교육을 여러 전문가에게 부탁했다. 제자들의 연구가 부진한 경우에는 집에서 이불보따리를 가져와 연구실에서 같이 동숙하면서 격려하기도 하였다.

제자의 성공을 선생님처럼 기뻐하는 교수는 없을 것이다. 부원장을 맡고는 진료와 연구의 대부분을 제자에게 넘겨주었다. 그 성과나 명예도 선생님이 차지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여건과 기초를 마련하고 제자들이 마무리하고 열매를 따가도록 했다. 덕분에 여러 제자들이 서울대를 비롯한 유수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아마 제일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 나일 것이다. 보잘 것 없는 능력을 가진 나를, 좋은 여건을 마련하고, 기회를 주고, 교육과 교정을 하고, 방패가 되어 주면서 조금이나마 업적을 이루게 했다. 그러고는 모든 영광은 나에게 주었다. 마치 자식에게 재산을 조건 없이 넘겨주듯이.

사람이 한평생 살다가 죽어서 무엇을 후세에 남길 수 있을까? 어떤 것이 가장 성공적인 삶의 증거일까?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쓸쓸한 내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다. 훌륭한 업적, 많은 재산, 높은 명망, 고귀한 인품? 또는 번창한 자손? 어느 것이 맞는 답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돌아가신 임을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오랫동안 기린다면 잘 산 인생이 아닐까?

 그렇다면 고창순 선생님이 으뜸이다. 제자인 우리 모두 이토록 그리워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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